그 아비에 그 자식

욕구가 욕심을 부르고, 욕심이 욕기, 욕념, 심욕을 불렀다. 그놈들이 제각각 야옥과 욕망, 탐욕을 데려오니 나는 그들에 둘러쌓여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어쨌든 그놈들은 모두 다른 데서 온 것 같아도 내 안에서 생겨난 놈들이니 그들을 내 자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외로이 살아가려 내치고 싶어도 그들이 하도 달라붙고 애원하는 통에 과감히 내치지 못하였다. 그들을 곁에 두고 한가로이 숨을 쉬거나 씻고 쉬는 등 가벼운 일상생활조차 여러모로 지장을 받으니, 저놈들은 둘 째치고 나부터 죽겠는데 이를 쉬이 뿌리치지 못한 것도 타고나기를 여물지 못해 물러 터진 탓이나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저놈들은 저들대로 아우성이었다. 아비가 되어 자식을 몰라주면 되느냐, 당신이 낳아놓고 왜 이제와서 딴청이냐, 진짜 인정머리 없는 인간이다와 같은 들었을 때는 기가차지만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 보면 그럴대로 다 맞는 말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 하염없이 먼 하늘만 멍텅구리처럼 쳐다 보게 되는 것이다.

제아무리 자식놈들이라 해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소리를 버럭 지르니 저놈들은 저놈들대로 화를 잔뜩 내는 것이 볼쌍사나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배불리 처먹여도 계속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자식들 때문에 내가 더 고통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여 저 빌어먹을 거지 자식들과 연을 끊고자 하나 둘 집 밖으로 버리기 시작했다.

집을 쓸어내고 벗겨내 청소를 하고 나면 어느새 멀리 내다 버렸던 놈들이 하나 둘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고함을 치며 화를 내보기도 하고, 어르고 달래 녀석들을 만족시켜 보려 하였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자식은 애비를 닮는다고 녀석들은 지 닮은 나를 꼭 잊지않고 다시금 내게 달라 붙어 한마디를 건넸다.

“아빠가 나를 낳았잖아요. 아빠가 책임져!”

프란츠 카프카, 작은 우화(Kleine Fabel)

“아!”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에는 하도 넓어서 겁이 났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드디어 좌우로 멀리에서 벽이 보여 행복했었다. 그러나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양쪽에서 좁혀드는지 나는 어느새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에는 덫이 있어, 내가 그리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너는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돼”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아 먹었다.
프란츠 카프카, <변신 시골의사, 세계문학전집4 中 작은 우화 Kleine Fabel>, 민음사, 2009
자기혁명은 가능할까. 모든 관습에서 탈피하는 일. 습관을 뒤집는 변혁. 내 모든 면에 일대혁명을 이룰 시기는 바로 지금인 것을. 나는 정말 알고 있을까. 패러다임의 변화, 자기혁명의 시작점. 그것은 오늘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내 가슴 깊숙이 인식하고 있을까. 줄곧 단방향으로 달려온 나는 어느날 내 안에서 변화의 소용돌이가 부는 걸 느꼈다. 그 날 후로 혁명을 외치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느껴진다. 나는 분명하고도 명확히 그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의지가 삶을 넘지 못했다. 생각에 육체가 갇혔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내 무의식 속에 일상을 벗어나면 큰 고통이 따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뿌리박혀 있다. 불안감은 혁명을 거부한다. 불안은 따뜻한 집, 하던 대로 할 것, 먹던 대로 먹을 것, 경험한 대로 할 것을 요구한다. 그게 숙주인 나를 죽음으로 몰고간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불안이라는 기생충은 늘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혁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작은 파도가 모이고 있다. 거대한 물결로 힘을 응집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헌데 어떻게 할 것인가. 내면의 소리를 잠재울 것인가. 들어볼 것인가. 선택은 내게 달렸다.

신데렐라맨(Cinderella Man, 2005)

사랑하면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지요. 어떤 모욕도 참아내며 자신의 배고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어여쁜 아이들과 헌신적인 아내를 위해 손이 부숴지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듯 앞으로만 내달릴 수 있나요. 그게 하나의 가족을 끌어가는 가장이 가진 힘인가요. 사랑하면 그런 건가요. 사소한 절망도 사치처럼 느껴지나요. 아마도 그럴 여유가 없는 거겠지요?

당신은 신파극의 단골소재로 잘 쓰이는 가족을 위해 삶에 투쟁하는 가장이지요. 가슴 한 곳이 찡한 이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달리는 모습에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가 보이기 때문이겠지요? 본인 처지를 한 번도 비관하지 않는 건 대공황이라는 시대에 비관조차 사치처럼 느껴져서겠지요? 앞으로 나아가야만 생존하는 환경이 그렇게 당신을 만든 거겠지요. 유명 권투선수가 퇴물이 되어 일용직 일자리르 전전한다손 치더라도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을 테니까요. 아내가 식료품 지원소에서 자신도 모르게 보급품을 허겁지겁 먹다가 펑펑 우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굶는 아이들, 비참한 눈물을 흘리는 아내. 그들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겠지요. 먹고 사는 게 꿈보다 중요한 시대니까요. 더구나 사냥에 실패한 범은 새끼들을 제 품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으니 실패하지 않기 위해 죽자 살자 해야 했겠지요.

그 모든 게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5~60년대 고난의 보릿고개가 영화 속 장면마다 오버랩되어 스쳐지나갑니다. 신파적인 요소가 가득하지만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러셀 크로우의 모습에서 어머니, 할머니, 아버지 등등이 떠올라 뜻깊게 보았습니다. 역시 신파는 공감이 주무기인 듯싶습니다.

스와미 사라다난다, 차크라의 힘

상당히 어렵다. 모호하다. 개념부터 원리까지 생소한 부분 투성이다. 제주 요가원을 다니며 들었던 용어들이 여기 다 나온다. 하지만 묘한 느낌만 얻어왔다.  요가, 명상, 차크라, 인도철학 등 의문가지 않는 곳이 없다. 시간을 두고 다양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명상법이 나온다. 신체의 7개 차크라가 각각 어떤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는지, 활성화하기 위해 어떤 명상과 요가자세를 연습해야 하는지 책은 설명한다.

 

차크라(cakra)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움직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어근인 차르(car) 에서 파생된 말인데, 흔히 바퀴라고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명상과 관련하여 차크라는 에너지적 신체인 미세 신체 내에 에너지 통로(나디)들이 교차하는 곳에촌재하는, 생기 에너지(프라나)로 이루어진 강력한 소용돌이를 의미합니다.

 

스와미 사라다난다, 차크라의 힘, 11쪽, 판미동, 2016

 
 

차크라들이 원활하게 기능하는 정도에 따라 당신이 얼마나 편안함을 느낄지, 얼마나 성공적인 관계를 맺을지, 얼마나 내면의 평화를 느낄지가 달라진다. 규칙적인 차크라 명상은 차크라들이 가능한 한 깨끗하게 열려서 제대로 기능하도록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는 정신적·감정적 행복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강도 보장한다. 차크라 명상은 내면의 안정감을 높이고 삶의 균형을 잡아 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방법이다. 매일 규칙적으로 수행하면 현재 당신 속에 깊이 감춰져 있는 비축된 에너지를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같은 책 16쪽

 
 

하타요가에서는 물질적 신체와 마음, 미세 에너지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여덟가지 원리를 주장한다. 첫째는 내적 정화와 외적 정화, 둘째는 육체적 수행, 셋째는 손짓과 몸짓으로 하는 에너지 봉인(무드라), 넷째는 호흡조절, 다섯째는 감각기관의 거두어들임, 여섯째는 집중, 일곱째는 차크라명상, 마지막은 절대적인 하나됨의 경험이다.

 

같은 책 27쪽

그런 날이 오겠지

그립겠지

그리운 날이 오겠지

푸른 초목 사이를

노니는 그 시절이

문득 떠오르는 때가 있겠지

싫다하던 바람을

불러보고 싶은 순간

있겠지, 뻥 뚫린 바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날이

그들이 나를 부르는 날

함께 술 한 잔하며

옛추억을 들춰보자고

소리없이 내 옆에 앉아

나를 부르는 날이 오겠지

 

바닷가 언저리에서

그들은 추억을 쌓고 기억을 담는다. 웃음을 나누고 미소를 배우고 우정을 모은다. 그들의 살구빛 입가엔 웃음장막이 흐르고 그 밑으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치아가 드러난다. 자연은 사람을 아이로 만든다. 그곳에선 백발의 노인도 아이가 된다. 신기한 일이지. 나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처다본다. 어쩜 나만 다른 세계에 온 듯 어색함을 느낀다.

하늘에 수놓인 별이 내 말동무였고, 흘러가는 구름이 소꿉친구였다. 문득 말을 걸고 싶어 바람에게 속삭이면, 그는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이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럴 때면 태양은 눈망울을 그렁이며 나를 따스하게 비추어 주었다. 때로는 있는 듯 없는 듯 말을 건네지 않고 지낼 때도 많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나를 이해해 주었다. 사랑은 기다림이라는 걸 알려준 별과 하늘과 바람과 나무, 비와 구름과 흙과 바다. 그 모두가 내 스승이자 동료이며 가족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 1965)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 1965)

밝고 통통 튀는 매력을 지닌 ‘마리아’는 엄격하고 무게감있는 ‘폰 트랩’ 예비역 대령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엄마를 여읜 뒤 아버지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 연일 사고를 치는 7명의 아이들을 돌보게 된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원래의 밝고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려주기 위해 아름다운 자연을 알려주고 쉽고 아름답고 즐거운 노래를 가르쳐준다. 엄한 아버지 ‘폰 트랩’은 그런 가정교사의 모습을 못마땅해 했지만 금세 사랑에 빠지고… 남작부인과의 약혼을 파하고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나치군에게 합병되는데 폰트랩과 마리아, 아이들은 가족합창단 대회를 기회삼아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한 사람이 가져오는 변화는 얼마나 큰가. 상처받은 한 가정을 따뜻한 손길과 밝은 미소, 아름다운 노래들로 치유하는 여인, 마리아는 어둠을 송두리째 걷어내 버리는 치유의 여신이다. 마법같은 힘으로 하나 둘 씩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그 엄청난 긍정의 기운에 나도 취해버렸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잘츠부르크와 스위스의 자연환경과 톡톡 튀는 멜로디와 가사가 매력적인 음악들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마리아’라는 사람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내가 본 마리아는 행복 전도사다. 자신의 넘치는 명랑함을, 밝은 미소를 주변 사람과 함께 나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던가? 마리아는 상처받은 가족들을 사랑으로 감싸며 함께 웃고 함게 즐긴다. 이로써 트랩가의 사람들을 행복전도사 마리아의 매력에 빠져들고 만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사라지면?? 트랩 대령부터 아이들 모두 금단증상(?)에 빠지는 거지 뭐.

오래된 고전영화 속 짧은 이야기에 담긴 사랑넘치는 장면들로 꽤 흐뭇했다. 한 사람이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한 가정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느끼면서. 물론 영화에 나오는 도레미송이라든가 에델바이스 같은 곡들뿐만 아니라 다른 OST곡들도 모두 훌륭하다.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2015)

“괜찮아, 다 잘될거야!

우리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했다. 질문을 좀 달리해서 ‘사람은 무엇으로 치유되는가’라 한다면 나는 ‘사람은 공감으로 치유된다’고 하겠다. 치유는 공감이다. 회복하는 힘은 공감에서 발생한다고 믿는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나는 ‘상실’이라는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떻게 ‘치유’되는지를 말해주는 영화로 읽었다.

그럴 때가 있었다. 사람에 치여 사랑에 차여 혼자가 되었을 때,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음을 알고 공허한 마음이 들었을 그 무렵, 마음의 빈 공간을 채워준 것은 또다시 ‘사람’이었다. 떠난 사람은 나와 내 감정, 내 삶을 공감하지 못했고, 빈 곳을 채워준 사람은 허탈한 마음을 위로해주고 함께 아파할 만큼 내 감정과 삶에 공감했다. 슬플 때 TV에서 흘러나오는 코미디 예능 프로그램은 나의 빈 곳을 채워주지 못했다. ‘웃음’은 ‘그들만의 웃음’이었고, 나처럼 웃으면 자연스레 행복해진다는 어느 강연자의 말도 내게는 ‘그들만의 이야기’ 쯤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빈 마음에 소리소문 없이 옆에서 어깨를 쳐 준 것은 수다스러운 사람도 아니었고 그저 밝기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어쩌면 조용하고 나와 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다른 사람과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공감력’이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상처받지만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받는단다.’

인사이드아웃을 보며 그 말이 떠오른다. 오래 전 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깊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버렸지만, 나를 동굴에서 꺼내준 것도 사람이었다. 기묘했다.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을 살게 하는 것도 사람이라니. 그때는 단지 ‘이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도 많지만, 그에 반해 좋은 사람도 많아서 그럴 거’라고만 여겼다. 사람이 좋고 사람이 나빠 생긴 단순한 우연의 일처럼.